얼마 전에 재즈 피아노의 거장 오스카 피터슨이 세상을 떠나서 많은 재즈 팬들을 아쉽게 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늙어 가고, 결국 세상을 떠나는 건 숙명이지만, 그래도 재즈계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이 떠나가는 건, 살 만큼 살고 이룰 것 다 이룬 뒤라고 해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살아 있다고 해도 나이가 들면 기력도 떨어지고, 감도 조금씩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현역에서는 물러난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나이인데 거기에 더해서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재즈맨들도 있습니다. 이 분들의 활동을 보면 노익장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냥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현역 시절에도 명장으로 재즈의 거장 대접을 받았지만, 지금까지도 그칠 줄 모르는 활동을 보여주는 네 분을 소개할까 합니다. 어쩌면 이 리스트를 읽다보면 "아니,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이야?" 라고 깜짝 놀라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행크 존스 (Hank Jones)
1918년생. 우리나이로 91살입니다. 이쯤 되면 살아 있는 게 대단한 것이고, 살아 있다고 해도 거의 거동조차 불편해서 집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분,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분입니다. 50년대 모던 재즈 당시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분으로, 엘빈 존스, 태드 존스와 함께 존스 3형제에서 맏형으로 날리던 분입니다. 오히려 동생들은 모두 고인이 됐죠. 피아니스트 10명이 펼친 무대로 우리나라에서도 열렸던 <100개의 황금 손가락> 공연 때도 지금은 세상을 떠난 존 루이스와 함께 80이 다 되어가는 최고령 피아니스트로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그것도 벌써 10년도 더 된 먼 옛날 얘기네요. 그때 누군가 행크 존스에게 지금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니, "좋은 선생님 있으면 가서 배우고 싶다"고 대답하더군요.
2006년에도 여든 아홉이라는 나이에 새 앨범을 내놓고 여전히 변치 않은 원활한 피아노 터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작년에도 조 로바노와 듀엣 앨범을 내기도 했습니다. 작년에도 무대와 음반 녹음 참여로 바쁜 활동을 한 행크 존스. 지금의 정력으로 보면 100살 기념 음반도 낼 수 있을 듯합니다.
데이브 브루벡 (Dave Brubeck)
아마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시던 분들도 <Take Five>란 곡을 들으면, "아, 이 노래?" 하고 무릎을 치실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광고에 워낙 많이 나온 노래라서 말입니다. 바로 그 곡을 작곡한 분이 데이브 브루벡입니다. 당시 재즈에서는 좀 낯선 5/4박자를 끌어들여서 독특한 리듬감을 만들어 낸 분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출신 클래식 작곡가인 다리우스 미요의 제자였던 만큼 클래식을 빌 에반스보다 더 적극적으로 재즈에 끌어들여서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정감있는 피아노 터치를 보여준 분입니다. 특히 알토 색소폰 주자인 폴 데스몬드와 콤비로 미국의 쟁쟁한 대학교를 돌면서 많은 공연을 펼쳤고,그 공연들 중에 상당수가 음반으로 나와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분이 1920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는 89살입니다.
하지만 작년에도 음반 나왔습니다. <Indian Summer>라는 앨범입니다. 이 분 자체가 속주 스타일로 화려하게 치기보다는 조근조근하면서도 클래식에 바탕을 둔 논리성을 갖추고, 느긋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분이기 때문에 그 로맨틱한 감성이 그대로 은은하게 퍼져 나갑니다.
로이 헤인즈 (Roy Haynes)
1925년생. 우리 나이로는 84살입니다. 드럼이라는 악기는 만만치 않은 체력이 필요합니다. 사지를 쉴새없이 계속 활용하고 정확한 리듬감을 유지하는 지휘자와도 같은 자리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4살이면 북 두드리기도 힘든 나이지만 이분은 정확한 리듬감, 밴드를 주도해 나가는 카리스마가 여전합니다. 듣고 있으면 정말 두툼하면서도 빈틈 없이 들어차 있는, 하지만 충분한 공간감이 공존하는 교과서 같은 드러머입니다.발라드면 발라드, 하드 밥이면 하드 밥, 아방가르드면 아방가르드, 퓨전이면 퓨전까지 전천후로 소화해 내는 능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로이 헤인즈를 찾고 있고, 여전히 활발한 활동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는 분입니다.
2006년에 공연 실황이 담긴 이 앨범에서도 하드 밥과 포스트 밥에 이르는 곡들 속에서 여전한 속도감과 들썩이는 그루브감을 충분히 살리는 멋진 드럼 연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정력 넘치는 분이 레스터 영, 콜맨 호킨스 같은 저 먼 옛날의 거장들과 활동했던 그 분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소니 롤린스 (Sonny Rollins)
이분은 4인방 가운데 나이가 가장 젊습니다. 1930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는 79살, 아직은 70대입니다. 80도 안 된 젊은이(?)가 어떻게 4인방에 들어가냐, 하실 분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4인방에 꼽은 이유는 첫째, 제가 좋아합니다. 둘째로는 색소폰이라는 악기가 에너지 소모가 많기 때문입니다. 손은 물론이고 기관지를 총동원해야 하는 관악기는 확실히 체력 소모가 많고, 테너 색소폰은 폐활량이 상당히 좋아야 하기 때문에 사실 나이든 분들이 대충 백제예식장 광고처럼 부는 거 아니라면 힘듭니다. 하지만 소니 롤린스, 이분 최근까지도 한번 필 받으면 클럽에서 밤새도록 기관총처럼 하드 밥을 불어제끼는 분이니 정말 호적을 속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이를 무색하게 합니다. 아마 재즈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신다면 소니 롤린스를 아실 겁니다. <Saxophone Colossus>, <A Night at the Village Vanguard>, <Way Out West>와 같은 명반들이 수두룩하고, 하드 밥 시대를 얘기할 때 얘기 안 하고 넘어갈 수 없는 거장입니다. 명성도 그렇고, 재즈계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봤을 때는 네 명 중 가장 거장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이 소니 롤린스이니, 얘기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저는 한참 모던 재즈의 최전선에서 명반을 쏟아내던 시절보다는 오히려 80년대 이후 나이 지긋한 때에 나온 앨범들을 더 좋아합니다. 기름기 찰찰 흐르면서도 원활하고, 나이의 깊이가 느껴지는 블로윙의 매력은 젊은 시절에 낸 음반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다른 매력이 있고, 여기에 어쿠스틱 대신에 일렉트릭 베이스를 잡은 밥 크랜쇼의 기름진 음색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이분도 2006년에 77살이라는 나이에 새 앨범을 내놓았습니다. 솔직히 <Sonny, Please> 앨범 자체는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하지만 <Plus 3>를 비롯해서 노년기의 앨범들이 워낙 완성도가 높아서 이 앨범에서 보여주는 정도로는 만족스러운 느낌이 안 들 정도로 이 분의 음악성은 나이가 들어서도 대단하다는 증거가 이 앨범입니다. 아무튼, 이 앨범이 만족스럽지 않으니 다른 앨범 하나를 더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9.11 테러 며칠 뒤에 있었던 공연을 녹음했던 <The 9/11 Concert> 앨범은 2001년에 녹음된 것인데, 젊은 사람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파워 블로잉을 보여주는 대단한 에너지로 꽉꽉 차 있는 앨범입니다. 특히 'Why Was I Born?'은 제 아이팟에서 가장 즐겨서 듣는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언젠가, 이분들도 악기를 손에서 놓을 날이 있을 것이고, 또 세상과 이별해서 많은 팬들을 아쉽게 할 날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있는 유물과도 같은 거장들이 더 오래 살아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작품들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모든 팬들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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