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2008년 포뮬러 1의 막이 올랐습니다. 스파이 사건, 슈퍼 신인 루이스 해밀튼 데뷔, 그에 따른 알론소-해밀튼 트러블, 키미 라이코넨 챔피언 등극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이 가득했던, 하지만 썩 유쾌하지는 않았던 2007년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을 깨끗히 리셋하고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는 2008년입니다.

아마도 드라이버들에게 가장 큰 변화라면 코너링과 같은 상황에서 구동력을 조절해서 타이어가 미끄러지지 않게 돕는 트랙션 컨트롤과 출발 과정을 손쉽게 해 주는 런치 컨트롤이 없어졌다는 점일 것입니다. 표준 ECU가 공급됨으로써 이러한 전자 지원 장치가 모두 사라져서 이제 F1 드라이버들의 기량 차이가 더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출발 때에도 로켓 스타트와 배드 스타트로 희비가 엇갈리는 풍경들이 더 많이 보일 것입니다.

겨울 테스트 페이스는 페라리가 돋보였습니다. 물론 맥클라렌 역시도 필적할 만한 성적을 보여줬지만, 양대 타이틀 획득으로 한참 물이 오른 페라리가 초반 기선을 제압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고, 올 타이틀 역시 키미 라이코넨과 페라리의 차지일 것이라고 생각한 전문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게다가 개막전인 호주 GP는 작년에 키미 라이코넨이 경기 기간 내내 연습주행부터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준 끝에 가볍게 폴투윈을 차지했던 곳, 많은 사람들이 그리드 가장 앞 자리는 키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스포츠는 언제나 예상을 깨는 반전이 있게 마련입니다.




1차 예선에서 1'26"140 플라잉 랩 기록을 찍고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키미의 1번 차량이 갑자기 속력이 뚝 떨어지더니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경악할 노릇이지요. 결승도 아니고 예선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키미는 어떻게 해서든 피트로 들어오기 위해서 애를 써 보지만 결국 피트 입구에서 차량은 멈춰서고 말았습니다.




키미는 결국 '자력으로 자기 피트에 돌아오지 못한 차량은 예선 다음 단계로 갈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2008년 첫 그랑프리 예선을 16위로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키미의 머릿 속에는 2006년에 맥클라렌에 있을 때, 호주 예선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머신이 대파되는 바람에 백 그리드로 가야 했던 일이 떠올랐을 듯합니다. 물론 그때도 백 그리드에서 3위로 완주하는 대단한 기량을 보여줬으니, 우승은 몰라도 키미에게 영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초반에는 고생 단단히 해야겠죠. 연료 펌프 압력 문제로 밝혀진 이 머신 고장은 페라리로서는 한마디로 재앙이었지만 언제나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맥클라렌으로서는 키미의 머신 고장이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인 키미가 1차 예선에서 주저앉았으니 루이스 해밀튼의 어깨도 그만큼 가벼워질 테니까요. 비록 앞차에 막혀서 조금 기록이 늦어지긴 했지만 해밀튼은 가뿐하게 1차 예선을 통과했습니다. 맥클라렌 이적 뒤 첫 경기를 치르는 헤이키 코발라이넨 역시 1차 예선은 손쉽게 통과했습니다.




1차 예선의 희생자가 키미 라이코넨이라면 2차 예선의 희생자는 마크 웨버였습니다. 사실 웨버가 호주 사람이기 때문에 고국 팬들은 뭔가 한 건 해 주기를 바랐을 텐데, 정말 한 건 했습니다. 2차 예선을 8분여 남겨 놓고 코너링 실수로 머신이 자세를 못 잡으면서 그대로 트랙 이탈. 자갈 바람 휘날리면서 그라벨 트랩에 멈춰 섰습니다.




덕분에 적기까지 나오면서 예선이 중단되었습니다. 결국 웨버 15위, 키미 16위가 되었습니다. 페라리에서 혼자 남은 펠리페 마사도 썩 좋은 페이스가 아니었습니다. 첫번째 연습 주행에서 키미가 톱 타임을 기록하긴 했지만 그 이후에는 썩 좋지 않은 기록을 내면서 핸들링이 좋지 않다는 불평을 했는데, 마사 역시도 셋업이 썩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키미 이전에 2연속 챔피언을 차지했던 페르난도 알론소도 다시 르노에 돌아온 첫 예선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2차 예선 통과에 실패하면서 혼다의 바리켈로에 이어서 12위. 팀 동료인 넬슨 피케 주니어는 끝에서 두 번째로 추락했습니다. 디퍼런셜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별로 상대로 생각도 안 했을 토로 로소 팀의 세바스티안 베텔은 10위로 통과했는데... 알론소로서는 과거의 영광이 눈 앞에 어른어른했을 듯합니다. 그에 비해서 작년에 죽을 쑤면서 F1 철수설까지 돌았던 토요타는 작년보다 한결 나아진 페이스였습니다. 야르노 트룰리는 물론 F1 첫 출전인 티모 글록이 2차 예선을 넘어섬으로써 올해 전망을 밝게 했습니다.

올해부터는 3차 예선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작년까지는 15분 시간을 주고 세션 시작 전에 연료를 주입한 다음, 세션이 끝나면 달린 바퀴 수에 FIA가 정한 표준 연료 소모량을 곱한 만큼을 재급유해야 했지만, 이렇게 하고 보니까 초반 5-7분 동안 머신을 가볍게 하려고 연료를 태우면서 서킷 유람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연히 이 '연료 태우기 시간'이 지루하다는 불만과 함께, 연료 낭비와 환경 오염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그래서 올해부터는 3차 예선이 10분으로 줄어들고 세션 전에 넣은 연료로 재급유 없이 레이스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3차 예선은 처음부터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3차 예선은 첫번째 플라잉 랩부터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습니다. 닉 하이드펠트가 1분 27초대로 톱 타임을 찍는 듯하더니, 그 뒤를 쫓아온 코발라이넨이 0.237 앞선 기록으로 꼭대기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3초 정도 차이를 두고 뒤를 쫓아온 펠리페 마사가 다시 코발라이넨을 0.406 차이로 밀어냈고, 또다시 3초 정도 뒤에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루이스 해밀튼의 기록은 1:27.092. 0.086초 차이로 마사를 누르고 일단 톱 타임을 차지했습니다. 다시 피트로 들어와서 타이어를 바꾸고 시작된 두번째 플라잉 랩. 그런데 여기서 로베르트 쿠비차가 일을 냈습니다.




체커가 나오 겨우 몇 초 전에 기록한 두번째 플라잉 랩에서 1:26.869를 기록, 3차 예선에서 처음으로 26초대로 진입하면서 톱 타임에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 쿠비차를 뒤쫓아서 들어온 코발라이넨은 26초대 진입에 실패했고, 펠리페 마사는 코발라이넨보다도 0.1초 밀리는 기록이었습니다. 마지막 기대는 루이스 해밀튼?




결국 루이스가 해냈습니다. 1:26.714를 기록, 쿠비차를 0.155초 차이로 밀어내면서 폴 포지션을 차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쿠비차로서는 중간에 트랙을 살짝 이탈해서 시간을 까먹은 게 통탄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생애 첫 F1 폴 포지션도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2위로 가장 앞 줄을 차지하면서 자신은 물론 BMW의 첫 우승도 노려볼 수 있게 됐습니다.




참고 : 위 사진은 자막이 잘못 되었는데, 사진에 나온 인물은 팀 총괄 감독인 스테파노 도메니칼리가 아니라 트랙 전략부장(Head of Track Operations) 루카 발디세리입니다. 지적해 주신 마하 3의 컨테이너선 님께 감사드립니다.

올해부터 쟝 토드의 뒤를 이어서 새롭게 페라리의 사령탑에 앉게 된 스테파노 도메니칼리로서는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입니다. 슈마허는 은퇴하고, 로스 브론은 혼다로 가고, 쟝 토드는 2선으로 물러나 앉음으로써 슈마허 시대의 드림 팀은 해체된 셈입니다. 포스트 슈마허 팀이 본격적으로 그 능력을 검증받게 될 2008년, 과연 이번 일이 2연속 타이틀을 위한 액땜이 될 지, 아니면 페라리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인지, 앞으로 관심 있게 지켜 봐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작년에도 시즌 중반 어려운 상황을 잘 이겨내고 챔피언이 된 만큼, 이번 일이 계속 악영향을 미치진 않을 겁니다. 입맛은 씁쓸하겠지만... 한편 맥클라렌은 루이스 해밀튼이 폴 포지션을 거머쥐고, '폴 포지션보다는 작년의 악몽을 극복할 확실한 성적을 내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가졌던 헤이키 코발라이넨도 3위를 기록하면서 개막전에서 확실한 우위를 틀어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2차 예선을 통과함으로써 올해도 대단한 기량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됐던 세바스티안 베텔은 3차 예선 첫 플라잉 랩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고 피트로 들어왔습니다. 오일 펌프 문제 때문에 랩 타임도 내지 못해서 10위로 만족해야 했습니다만, 9위를 기록한 토요타의 티모 글록이 기어박스 고장으로 5 그리드 페널티를 받고, 여기에 다시 레드 불의 마크 웨버를 방해했다는 혐의로 5 그리드 페널티를 또 받음으로써 19위로 밀려나는 바람에 아홉 번째 그리드를 차지하게 된 셈이지요.

확실히, 트랙션 컨트롤과 같은 전자 지원 장치가 사라졌기 때문에 드라이버들은 코너링에서 좀 더 많은 실수를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만큼 경기 도중에 작은 실수가 경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발전할 여지가 많아진 셈입니다. 특히나, 예전에는 런치 컨트롤 덕택에 드라이버가 아니라 피트 쪽에서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고까지 하는 출발 때가 볼만할 듯합니다. 이제는 철저하게 드라이버에게 맡겨지는 데다가 트랙션 컨트롤이 없어져서 휠 스핀이 나기 쉬워졌기 때문에 출발 때 실수로 순위를 까먹는 드라이버가 많아질 공산이 커졌습니다. 반대로 데이빗 쿨타드처럼 로켓 스타트를 자랑하는 드라이버들이 그동안 제대로 써먹지 못했던 노하우를 통해서 덕을 볼 수도 있겠죠. 또한 트랙션 컨트롤이 없어져서 출발 때 그립이 무척 중요해졌기 때문에 고무가 많이 깔리고 노면이 깨끗해서 그립이 좋은 홀수 그리드 쪽이 예전보다 많은 잇점을 가질 확률도 높아졌습니다. 아무튼 개막전은 머신 안정성이 아직까지는 완벽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여러 가지 변수가 참으로 많은 경기입니다. 과연 레이스에서는 또 어떤 드라마들이 펼쳐지고 누가 웃고 누가 울게 될 지, 2008년 F1 첫 레이스를 기대해 봅니다.
Posted by M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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