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뮬러 1 두번째 레이스가 호주 그랑프리 개막전이 벌어진 지 1주일 만에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집니다. 팀들은 무척 바빴을 겁니다. 저 남반구 호주 멜버른에서 일요일에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짐을 싸서 모든 차량과 장비, 사람들이 말레이시아로 가야 하니, 그야말로 '대이동'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을 것입니다. 워낙에 짐 싸는 데에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니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호주에서 더블 리타이어라는 수모를 당한 페라리는 이번 경기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확실하게 찾고 벌어진 포인트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일 것이고, 반면 루이스 해밀튼이 우승을 차지한 맥클라렌은 이 여세를 몰아서 내친 김에 초반에 기선 제압을 확실히 하려고 할 것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말레이시아는 열대 기후입니다.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고 습도가 무척 높습니다. 따라서 드라이버들에게는 그야말로 고역입니다. 보통 말레이시아 레이스에서 드라이버들은 한 시간 반 만에 많게는 3 리터정도까지 수분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드라이버들은 보통 말레이시아를 대비해서 기후 적응과 수분 보충을 위한 훈련과 식사 조절에 들어갑니다. 물론 변덕스러운 말레이시아의 날씨 역시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미 일요일 레이스 날에도 궂은 날씨가 예보되어 있고 언제 소나기가 쏟아질 지 알 수 없는 게 말레이시아 날씨입니다. 예선 때도 역시 비가 예보되어 있어서 그런지 예선이 시작되자마자 차량들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보통 1차 예선 때에는 끝에서 6대만이 탈락되기 때문에 톱 팀들은 실수 없이 돌았다면 탈락할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엔진과 차량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 바퀴만 돌고 마는 게 보통이지만 이 날은 달랐습니다. 키미 라이코넨은 플라잉 랩을 연속 두 번이나 돌았고, 많은 드라이버들이 플라잉 랩을 두 번 넘게 돌았습니다. 위 사진을 봐도, 아직 1차 예선이 14분 37초나 남았는데 키미 라이코넨이 벌써 두번째 플라잉 랩을 돌았습니다. 만약 예선 중간에 갑자기 소나기라도 온다면 그 전에 제 기록을 못 낸 드라이버는 예선 탈락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셈입니다.
1차 예선에서 가장 좋은 기록을 낸 드라이버는 맥클라렌의 헤이키 코발라이넨으로 1:35.227을 기록했습니다. 코발라이넨은 다른 세 드라이버와는 달리 늦게 트랙에 나서 플라잉 랩 한 번으로 톱 타임을 찍었습니다. 페라리의 마사와 맥클라렌의 해밀튼, 페라리의 키미가 뒤를 이어서 1차 예선 결과는 맥클라렌-페라리-맥클라렌-페라리가 된 셈입니다.
하지만 2차 예선에서는 확실하게 페라리가 리드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2차 예선 역시도 비가 언제 올 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처음부터 톱 팀들이 줄줄이 트랙에 나섰는데, 먼저 헤이키 코발라이넨이 1:34.759로 톱 타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온 해밀튼은 기록 경신 실패, 그 뒤로 페라리의 붉은색 머신 두 대가 달려왔습니다.
먼저 피니시 라인을 밟은 키 라이코넨이 1:34.188로 코발라이넨을 밀어내고 톱 타임을 기록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작년 말레이시아 그랑프리 폴 포지션이었던 펠리페 마사는 1:34.967로 3위를 기록했습니다.
호주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던 BMW 자우버는 세팡에서도 안정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로베르트 쿠비차가 1:34.648을 기록, 2위를차지했고 호주에서 2위를 기록했던 닉은 1:34.648로 5위를 기록했습니다. 게다가 이 기록은 중간에 실수로 시간을 까먹었는데도 낸 기록이라서 그 실수가 없었다면 2차 예선 1위 자리를 차지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한편으로 놀라움을 준 선수는 윌리엄스의 니코 로즈베르크입니다. 하지만 이 놀라움은 닉과는 반대 방향이어서, 니코는 1차 예선에는 괜찮은 기록을 냈지만 2차 예선에서 1:35.670으로 미끄러지면서 예선 탈락을 당했습니다. 차량 탑재 카메라를 보면 앞쪽 그립이 부족한지 스티어링이 상당히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코너링에서 시간을 많이 까먹은 듯합니다. 호주에서 3위를 차지해서 생애 첫 F1 포디움에 올랐던 니코로서는 이번 말레이시아는 만만치 않을 듯합니다.
2차 예선이 막판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한번 페라리와 맥클라렌의 두번재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그 결과는 라이코넨-코발라이넨-마사-해밀튼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날 예선에서는 줄곧 코발라이넨이 해밀튼을 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레드 불의 데이빗 쿨타드는 12위를 기록했는데, 연습 주행 때 갑자기 앞쪽 서스펜션 부분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서 FIA에서 레드 불의 서스펜션 결함 여부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했던 터라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같은 팀의 마크 웨버는 2차 예선을 통과했지만사건 당사자였던 쿨타드는 결국 2차 예선 통과에는 실패했습니다. 그와 비교한다면 예선의 사나이, 토요타의 트룰리는 페라리-맥클라렌-BMW 자우버에 이어서 7위 기록으로 2차 예선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팀 티모 글록도 2차 예선을 통과했습니다. 올해 토요타는 아직 정상급이라 하기엔 부족하긴 하지만 확실히 작년보다는 나아 보입니다.
이제 마지막 10분에 걸친 3차 예선이 남았습니다. 시간도 10분, 남은 차량도 열 대. 그리드 가장 앞 자리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일 때입니다. 연습 주행 때 상황이나 1, 2차 예선 결과를 보면 아마도 폴 포지션 자리는 페라리에게 돌아갈 것 같습니다. 마사냐? 라이코넨이냐? 이것만 남은 듯합니다. 트랙에 나선 페라리는 흰 줄이 그어진 소프트 옵션 타이어를, 맥클라렌은 줄이 없는 하드 옵션 타이어를 끼고 나왔습니다.
역시 3차 예선 첫 플라잉 랩에서도 코발라이넨이 해밀튼을 앞서는 기록을 냈습니다. 물론 두 드라이버의 연료 적재량에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예선 내내 해밀튼이 코발라이넨보다 조금 떨어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뒤에 달려오는 붉은색 머신이죠.
압도적으로 페라리가 좋은 기록을 냈습니다. 페라리 드라이버들은 0.5초를 넘는 격차로 가뿐하게 1, 2위를 차지했습니다. 둘 사이에서는 역시 작년 폴 시터답게 마사가 라이코넨을 앞섰습니다. 결국 양 팀의 세컨드 드라이버가 퍼스트 드라이버를 이긴 셈입니다.
게다가 쿠비차가 코발라이넨과 해밀튼 사이에 끼어서 4위를 기록, 해밀튼이 5위까지 밀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물론 기회는 한 번 더 있습니다. 피트에서 타이어를 바꿔 끼고 나온 맥클라렌. 이번에는 흰 줄이 그어진 소프트 옵션입니다.
해밀튼이 막 두번째 플라잉 랩을 시작하려고 할 때 토요타 차량이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해밀튼은 그 뒤로 붙어서 슬립 스트림을 타고 출발선을 넘었는데, 이것이 도움이 조금이라도 됐을지, 오히려 앞에 차가 있다는 심리적 부담 때문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을지, 그 결과는 잠시 후에 봐야겠습니다.
두번째 플라잉 랩은 페라리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라이코넨이 다시 마사의 기록을 0.2초 정도 당기면서 톱 타임을 찍자 뒤따라 온 마사가 다시 한번 0.4초가 넘는 큰 격차로 라이코넨을 밀어냈습니다. 아무래도 두 드라이버 사이에 연료 적재량이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코발라이넨은 마사와 0.8초가 넘는 격차로 3위에 머물렀습니다. 그 뒤를 쫓아온 쿠비차의 기록은 1:36.727. 4위입니다. 과연 그 뒤로 보이는 해밀튼이 쿠비차와 코발라이넨을 밀어낼 수 있을까요?
쿠비차는 넘었지만 코발라이넨보다는 떨어지는 기록으로 4위에 머물렀습니다. 결국 페라리가 가장 앞 줄을, 맥클라렌이 두 번째 줄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펠리페 마사는 아직 3차 예선이 10 초 남은 상태에서도 이미 폴 포지션은 내 것이라는 듯이 연신 손을 흔들어댔습니다. 아무튼 예선은 대략 이렇게 마무리 되는 듯했습니다. 마지막 변수, 닉 하이드펠트가 몇 위가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생겼습니다. 플라잉 랩을 돌던 닉 하이드펠트 앞에 느릿느릿하게 주행하는 차량 여러 대가 보인 것입니다. 게다가 맥클라렌 차량은 하필 레이싱 라인, 곧 가장 빠르게 트랙을 돌기 위해서 타야 하는 라인 위에 있었습니다. 솜씨 좋게 빠져 나오긴 했지만 이 바람에 시간을 까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뒤에서 플라잉 랩을 타던 알론소도 똑같은 상황에 놓였습니다. 결국 두 드라이버는 맥클라렌 드라이버들이 자신들의 주해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항의를 제기했고 이 항의가 받아들여져서 해밀튼과 코발라이넨은 각각 5 그리드씩 밀려서 8위와 9위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닉과 알론소 뿐만 아니라 아무래도 바로 뒤에 맥클라렌 차량을 둬야 했던 페라리 역시도 맥클라렌의 페널티는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맥클라렌만이 아니라 다른 차량들도 마지막 플라잉 랩을 돈 다음에는 대단히 느릿느릿하게 도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연료를 최대한 아끼기 위한 행동입니다.
F1 엔진의 연비는 그야말로 극악입니다. 2.4 리터 배기량으로 최대 회전수 19,000 rpm에 750 마력이 넘는 출력을 내기 때문에 엄청난 연료를 소비하는 데다가 수많은 급가속과 급제동 과정에서 소비되는 연료량까지 생각하면 레이스 때 F1 엔진은 거의 1리터 당 1km라는 극악의 연비를 자랑합니다. 따라서, 느릿느릿하게 정속으로 주행하는 것만으로도 한 바퀴에 리터 단위로 연료를 아낄 수 있습니다. 레이스 때까지 재급유가 금지되어 있어서 최대한 연료를 아끼기 위해서 느릿하게 달린 건데, 맥클라렌 드라이버들은 레이싱 라인에 걸려 있던 게 결국 5 그리드 페널티를 받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아무튼 드라이버들은 예선에 대한 규정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서 이런 일을 막기 위한 규정 변경을 FIA에 촉구하고 있습니다.
페라리로서는 맥클라렌이 뒤로 밀린 김에 확실하게 1-2 피니시로 최대한 포인트를 거두고 떨어진 자존심을 확실하게 회복하려고 할 것입니다. 맥클라렌으로서는 상황이 어려워졌지만 어떻게든 출발 때 최대한 순위를 올리면서 상위권을 노리겠죠. 물론 맥클라렌이 밀림으로써 3위로 발돋움한 토요타의 트룰리, 그 다음 4, 5위에 놓이게 된 BMW 자우버 역시 최소 포디움을 노릴 것입니다. 일요일 일기 예보로는 소나기가 예정되어 있어서 날씨 역시도 레이스 도중에 상당한 변수가 될 것입니다. 예선 결과를 놓고 본다면 내일 레이스에서 페라리의 페이스가 압도할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장담하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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