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의 첫 두 경기를 생각해 봅시다.
개막전인 호주 그랑프리에서는 페라리의 키미 라이코넨이 압도적인 기량으로 편안한 우승을 차지했지만, 그 다음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에서는 예선에서는 페라리가 앞섰으나 레이스에서는 맥클라렌이 페이스를 잡고 1-2 피니시를 기록했습니다.
2008년 개막전은 반대가 됐습니다. 페라리는 더블 리타이어라는 수모를 겪었고, 한편 맥클라렌의 루이스 해밀튼은 손쉽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 다음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의 결과는? 역시 반대가 되었습니다.
페라리의 기량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팀들을 한 바퀴에 1초씩 앞서는 엄청난 격차를 보여주면서 키미 라이코넨이 편안하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미 페라리는 예선에서부터 페이스를 잡고 있었고, 레이스에서도 그 분위기가 이어질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맥클라렌이 예선 때 페널티를 받아서 3, 4위에서 8,9위로 밀려버림으로써 페라리의 두 드라이버는 더욱 어깨가 가벼워진 상태였습니다. 출발 때에도 페라리는 경쾌하게 펠리페 마사와 키미 라이코넨이 예선 성적 그대로 1-2위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맥클라렌의 루이스 해밀튼은 로켓 스타트로 9위에서 5위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왔습니다.
한편 토로 로소의 세바스티앙 부르대는 출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코스 아웃하고 리타이어. 그밖에는 큰 사건 사고는 없는 매끈한 출발이었습니다.
해밀튼은 출발은 좋았지만 그 뒤에는 레드 불의 마크 웨버에게 한참을 붙잡히면서 좀처럼 페이스를 내지 못했습니다. 뒤에 있는 토요타의 야르노 트룰리도 뿌리치지 못하면서 호주 때와는 달리 그저그런 기량 밖에는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페라리와 격차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 바퀴에 1-2초씩이라는 심한 차이로 뒤지고 있었습니다.
온 보드 카메라를 보면 해밀튼의 왼쪽 앞 타이어가 눈에 띄게 빨리 닳아서 흰 줄이 잘 안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팡 서킷은 구간별로 특성이 완전히 다른 스타일입니다. 중간 구간은 코너가 많은 중저속 구간인 반면에 마지막과 처음은 긴 직선이 두 개나 있는 고속 구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차량의 셋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같은 차량이라고 해도 성능은 크게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결국 맥클라렌은 셋업에 실패해서 타이어 퍼포먼스가 나빴다는 추정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코너링이 많은 중간 구간에서 눈에 뜨이게 타임이 떨어지는 것에서도 타이어를 잘 못 쓰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경기는 그야말로 페라리의 집안 잔치로 돌아가서 마사와 라이코넨은 1-2초 정도 격차를 두고 쾌속 주행을 해 나갔고, 3위 로베르트 쿠비차와 격차는 죽죽 벌어져 나갔습니다. 작년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에서 폴 포지션을 차지했지만 출발 때 페르난도 알론소와 루이스 해밀튼에게 자리를 내 주고, 해밀튼과 경쟁에서 실수로 그나마 3위 자리까지 잃어버린 마사로서는 폴투윈 우승으로 작년의 안 좋았던 기억을 만회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39 바퀴를 남기고 먼저 피트에 들어온 차량은 넘버 2. 펠리페 마사였습니다. 8.5초라는 나쁘지 않은 피트 스탑 타임이었지만 키미와 격차는 1-2초 안쪽이었기 때문에 마사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머신이 가벼운 키미는 한 두 바퀴만 더 돌아도 피트 스탑 뒤에 마사 앞에 설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불안한 예상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 바퀴에 들어온 키미는 간발의 차이로 마사 앞에 섰습니다. 앞 자리를 차지한 키미는 그대로 내달려서 마사와 격차를 벌입니다.
한편 루이스 해밀튼은 앞에 있던 마크 웨버가 일찍 피트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상황이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늦게 들어가는 해밀튼이 당연히 웨버를 앞설 수 있을 테니까요. 37 바퀴를 남기고 피트 스탑한 해밀튼. 하지만 호주 그랑프리에서 페라리를 농락했던 운명의 신이 이번에는 해밀튼에게 손길을 뻗쳤습니다. 오른쪽 앞 타이어가 좀처럼 빠지지 않으면서 시간을 심하게 까먹어 버린 겁니다. 결국 피트 스탑 타임은 19.9초. 다시 트랙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11위로 저만치 처져 버렸습니다. 해밀튼은 이제 포디움이 아니라 1 포인트라도 따야 하는 신세가 되어, 결국 또다시 마크 웨버 뒤에서 어려운 레이스를 벌이게 됐습니다.
피트 스탑에서 눈에 뜨이는 점이 있다면 많은 차량들이 하드 옵션 타이어를 쓰면서 피트 스탑 때 타이어를 바꾸지 않고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소프트 옵션은 세팡에서 너무 빨리 닳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드 컴파운드 쪽이 더 좋은 답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 레드 불의 마크 웨버는 상당히 좋은 페이스를 유지했습니다. 호주에서는 초반에 리타이어하면서 고국 팬들 앞에서 영 체면을 구겼는데 말레이시아에서 이를 만회하는 안정된 주행으로 해밀튼에게 좀처럼 자리를 내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토요타의 트룰리도 레이스에서는 종종 실수나 집중력 부족으로 리타이어를 밥 먹듯이 했던 모습과는 달리 안정된 주행으로 계속 코발라이넨의 뒤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호주에서는 예선 2위를 차지했지만 리타이어하고 만 BMW 자우버의 로베르트 쿠비차도 이번에는 별 탈 없이 3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쿠비차 역시도 페라리와 격차가 너무 심해서 중반전에는 이미 20초가 넘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페라리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1-2 피니시로 호주 그랑프리의 복수를 확실하게 해 줄 수 있을 듯 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실수로 1-2 피니시의 꿈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라이코넨의 뒤를 쫓던 펠리페 마사가 30 바퀴 째에 턴 8에서 컨트롤을 잃으면서 스핀했습니다. 하필 빠진 곳은 자갈이 잔뜩 쌓여 있는 부분. 어떻게든 탈출해 보려 하지만 뒷바퀴는 헛돌기만 하고, 결국 마사는 호주에 이어서 연속 리타이어를 기록하면서 머신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혹시 스티어링이나 기어박스의 문제로 컨트롤을 잃은 것은 아닐까? 호주 그랑프리의 악몽이 또다시 재현되는 것일까? 과연 키미는 문제 없이 완주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의문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쿠비차와 20초가 넘는 격차를 만들어 놓은 라이코넨은 알게 뭐냐는 듯이 계속 쾌속 질주를 이어 나갔고, 어느덧 경기는 후반전을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19 바퀴를 남기고 피트로 들어온 키미 라이코넨. 별 탈 없이 스탑을 마치고 쿠비차 바로 뒤에 들어왔습니다. 어차피 쿠비차도 피트 스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머신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압도적인 우승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해밀튼도 별 탈 없이 피트 스탑을 마쳤고, 마크 웨버가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해밀튼은 트룰리 뒤에서 5위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해밀튼으로서는 피트 스탑 때 있었던 문제와 함께 이 무더위에 물 공급 장치까지 고장나서 상당히 어려운 레이스가 이어졌습니다. 예선 페널티부터 시작해서 잇따른 악재에도 불구하고 5위를 하고 있는 것도 용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41 바퀴째에 세바스티앙 베텔의 페라리 엔진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더니 배기구 쪽에서는 불꽃까지 일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토로 로소는 또다시 더블 리타이어. 과연 키미의 엔진은 끝까지 버텨 줄까? 하는 의심이 다시금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키미의 머신은 별 다른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격차도 별로 줄지 않았습니다.
막판에 가장 관심을 끈 경쟁은 4위 자리를 건 야르노 트룰리와 루이스 해밀튼의 싸움이었습니다. 두번째 피트 스탑에서 하드 컴파운드로 바꾼 해밀튼이 트룰리와 격차를 한 바퀴에 1초 가까이 줄여 나가면서 싸움에 불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남은 바퀴 수가 많지 않습니다. 과연 해밀튼이 해낼 수 있을까요?
한편 7위 자리를 두고도 레드 불의 마크 웨버와 르노의 페르난도 알론소가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알론소의 페이스가 조금 더 좋았기 때문에 잘 하면 역전도 노려볼 만했습니다. 하지만 두 드라이버 모두 결국 역전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트룰리도 웨버도 뒤에서 심한 압박을 받으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페이스를 잘 유지했고, 한편 키미는 편안하게 체커 깃발을 받으면서 호주 그랑프리의 악몽에서 탈출하는 멋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포디움에 1위 키미와 3위 코발라이넨, 이렇게 핀란드 인 두 명이 섰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그러고 보면 드문 일입니다. 이제 두 경기를 치렀습니다. 첫 경기는 맥클라렌의 강세, 두번째 경기는 압도적인 페라리의 승리였습니다. BMW 자우버는 그 틈바구니 속에서 두 번 모두 2위를 차지하면서 페라리와 맥클라렌에 이은 3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숨쉴 틈 없이 두 주 연속으로 경기를 치른 F1은 이제 두 주 뒤 바레인에서 세번째 경기를 치릅니다. 바레인은 페라리가 지난 겨울 테스트에서 폴 포지션 기록을 넘는 대단한 기량을 보여준 곳이라서 역시 페라리에게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승을 거머 쥐었지만 아직까지는 조금 불안한 모습인 페라리, 호주와는 너무나 다른 실망스러운 모습의 맥클라렌, 이 양강 구도의 틈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BMW 자우버, 이 3강과 함께 도약을 노리고 있는 토요타와 레드 불의 전쟁도 점점 불이 붙고 있습니다. 물론 호주 그랑프리와 비교하면 이번에는 성적이 좋지 않은 르노와 윌리엄스 역시도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습니다.
맥클라렌 단장 론 데니스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경기까지는 가 봐야 정확한 팀들의 수준을 알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아직까지는 누구도 유리한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머지 않아 누가 주도권을 쥘 지는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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