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년에 영화 보는 횟수가 손으로 꼽을 만한 그냥저냥한 사람이라 어떤 영화에 대해서 평가를 내릴 자격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느낀 점이나 생각한 점이 있을 때, 제 블로그에 이를 적는 정도 쯤이야 돈 내고 영화를 본 관객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봅니다. <놈놈놈>을 보고 나오면서 머릿 속에 떠오른 한 마디는 '재미있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놈놈놈>은 확실히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지루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어째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단어가 한꺼번에 떠올랐을까...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언뜻 언뜻 들었던 생각을 펼쳐 놓아 볼까 합니다.





캐릭터

이 영화는 스토리보다는 캐릭터의 영화라고 봅니다. 세 명의 개성이 강한 캐릭터가 저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맞물려 돌아가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연속... 아마 이런 게 이 영화가 가져야 할 미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 캐릭터를 생각해 보면 '잘 살은 놈, 못 살은 놈, 딱 그 놈'으로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좋은 놈' 정우성은 장총 하나 들고 무한 총탄으로 적들을 섬멸하는 슈퍼 히어로의 모습을 잘 보여줬습니다. 연기력에 대해서 아쉬움을 던지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피터팬 혹은 타잔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원 샷 원 킬을 하는 장면, 역시 장총 하나로 기관총 무장까지 한 일본군을 싹쓸이 하는 장면과 같은 시원시원한 액션 신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멋있는 서부의 사나이로 카리스마와 캐릭터는 잘 살았다고 봅니다. 옛날 고등학교 때 봤던 주윤발의 추억을 서부에서 다시 본다고나 할까요.

아쉬웠던 건 '나쁜 놈' 이병헌입니다. 액션 장면에서 과연 이병헌이 보여준 모습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본다면 정우성에 비해서 크게 비중이 떨어졌고 인상적인 액션 장면도 훨씬 부족했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서,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사막 추격 신에서 이병헌이 한 일이라고는 말타고 열심히 송강호 뒤만 쫓아다닌 일 뿐입니다. 정우성은 혼자서 장총 하나로 일본군을 거의 몰살하다시피 할 때, 이병헌은 말에서 떨어지자 같은 마적을 쏴서 말을 빼앗아 타는 굴욕을 겪는 상황입니다. 만약에 이랬으면 어땠을까요? 정우성과 이병헌이 합작으로 일본군을 몰살하면서(일본군이 이병헌 일당도 몰살시키려고 하는 판이었으니까 이병헌도 공격할 명분은 충분하죠), 그 사이사이에 서로에 대한 공격까지 하는 더블 플레이를 했다면 좀 더 액션도 화끈하고 이병헌도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칼 던져서 벌레 잡는 주성치의 <007 북경특급> 같은 장면 말고,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네오와 하늘을 날면서 사생결단을 벌이던 스미스 요원과 같은 그런 강력한 악당의 이미지를 보여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듭니다. 폼은 많이 잡는데 정작 액션은 확 눈에 뜨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상한 놈' 송강호는 예상했던 '딱 그 놈' 만큼을 해 준 캐릭터입니다. 엉뚱하고, 능글맞고, 비굴하고, 하지만 뭔가 포스를 숨기고 있는 이상한 놈에 맞는 역을 딱 해 주었습니다. 저 역할은 애초부터 송강호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또 저런 스타일?'이라고 식상하다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저런 능청스럽고 코믹한, 하지만 행간에 카리스마가 스윽 묻어나는 스타일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연기자는 별로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걸 비난하는 건 주성치가 코미디 영화만 한다고 비난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상투성을 벗어나려다 발목이 잡힌...

<놈놈놈>의 스토리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은 듯합니다. 사실 중간중간에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갑자기 점프하는 부분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가 부각시키고자 하는 상품성을 볼 때, 그 정도는 호쾌한 액션 신이 보여주는 쾌감으로 상쇄하면서 넘어가 줄만 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제의 근원은 스토리에 무관심했다기보다는 스토리를 의식은 했으되 그 방법이 설익었던 게 화근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토리로 본 <놈놈놈>은 주인공의 관계에서 상투적인 라인을 피해 나가려고 노력한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있다면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관계는 좋은 놈과 나쁜 놈의 적대 관계에 이상한 놈이 이상하게 끼어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꼬이는 거죠. 하지만 <놈놈놈>에서는 나쁜 놈과 이상한 놈이 주요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좋은 놈이 이상한 놈과 필요에 따라 손을 잡고 나쁜 놈을 잡으려 하는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상투적인 관계를 약간 꼰 관계가 된 셈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꼬아 놓은 관계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살짝 비틀어진 세 사람의 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지 못하고 뭔가 한 사람은 겉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는 거죠. 좋은 놈과 이상한 놈이 결탁할 때에는 나쁜 놈이 완전 겉도는 분위기가 되어 버리고, 이상한 놈이 도망간 뒤에는 좋은 놈이 붕 떠 버리고, 뭐 이렇게 되어 버리더라는 겁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앞에서 얘기했던, 이병헌이 생각 만큼 살지 못했던 문제도 나쁜 놈은 쌍심지 돋우면서 이상한 놈과 각을 세우는데 이상한 놈은 비껴가서 능청스런 코미디를 하고 있다는 게 문제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놈과 한판 제대로 사생결단을 벌이지 못하는 나쁜 놈의 쌍심지가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드는 거죠. 제 생각에는 오히려 상투적인 구도를 그대로 갖다 쓰는 편이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원래 전통적으로 늘상 우려먹는 그 구도는 그 나름대로의 미덕이 있기 때문이고, 어차피 이 영화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의 기발함을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라면 오히려 검증된 속편한 구도가 낫지 않을까요?

결국 <놈놈놈>의 캐릭터가 전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상투성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했는데 그 시도가 절묘하지 못하고 어설펐다는 데에 있을 듯합니다. 캐릭터를 내세우는 영화에서 캐릭터 사이의 팽팽한 긴장 관계가 흐트러지면 맥이 확 풀리는 느낌을 받는 건 어쩔 수 없겠죠.


서투른 '여백 채우기'

<놈놈놈>을 지루하게 만든 또 한 가지 원인은 '너무 길다'는 점입니다. 세 시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호쾌한 액션 신이 여러 번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느끼게 했던 원인은 그 호쾌한 액션과 액션 사이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 시간 내내 액션만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영화가 절묘한 스토리를 내세운 것도 아니라면 관객들에게 뭔가 이것저것 생각할 시간을 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약점이 보이고, 이것저것 의문을 던지게 되는 법입니다. <나쁜 녀석들> 처럼 두 주인공 사이에 끝없는 말싸움으로 이어지는 말 개그로 채우든, <원티드>처럼 빠른 편집과 인상적인 장면들을 계속 뮤직 비디오처럼 보여주는 방식으로 몰입을 시키든, 어쨌거나 관객들의 눈을 계속 붙들어 매 놓고 생각을 여유를 주지 않아야 하는데 <놈놈놈>에서는 속도감 있게 몰아치는 액션 장면이 끝나면 갑자기 확 김이 빠지면서 느릿느릿해집니다. 그렇다고 무언가 생각할 화두를 던져 주면서 딴 생각을 못 하게 붙들어 놓는 것도 아니고, 이런 점에서 '여백 메우기'가 서툴지 않았던가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두 시간 반이 넘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한가, 이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같이 본 사람에게 "120분 정도였다면 훨씬 재미 있었을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듣자 하니 칸 영화제에서는 120분 편집판으로 나갔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훨씬 밀도가 높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이런 저런 아쉬움을 얘기했습니다만, 그래도 이만큼 재미있게 본 한국영화가 드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놈놈놈>은 건질 게 많은 영화입니다. 적어도 황야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은 이만큼 영화라는 걸 잊을 수 있게 긴장감과 몰입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역동성이 느껴지는 스펙터클한 명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반의 열차 대결이나 마을에서 벌어지는 총격전 역시도 액션 신만 놓고 본다면 이제는 어느 나라 영화도 부러울 게 없는 뛰어난 감각을 보여준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스토리가 좀 부실하다고 해도, 캐릭터의 균형감이 흐트러진다고 해도, 그런 쾌감들을 충분히 즐길 만큼 푸짐하게 펼쳐 놓았다면 '즐겁게 봤으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이 영화를 볼 의미는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가장 끝에 놓긴 했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아쉬움을 얘기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나빠서라든가 이 영화를 본 것을 후회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아쉬움을 넘을 수 있다면 다음에는 훨씬 더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수많은 잠재력을 담은 이 영화는 명화의 반열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을 만한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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