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가끔 글에서 '미메시스' 얘기를 했더랬습니다. 90년대 초,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문화에 충격파를 던지면서 혜성같이 나타났을 때, '미메시스'란 동인들이 나서서 서태지를 혁명가로 찬양했습니다. 당시 <서태지, 네 멋대로 해라>란 책에서 미메시스 그룹은 서태지를 혁명가요, 예술가요, 과학자로 묘사하면서 온갖 찬사를 늘어 놓았습니다. 이미 10년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 좀 가물가물합니다만, 아마도 트로츠키 그룹이었던 IS(국제사회주의자)의 분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기억이 정확하지 않으면 댓글로 바로 잡아 주시길). 어쨌거나, 이들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IS에서 파생되어 나온 그룹 답게 북한에 대해서 웬만한 보수주의자들보다 호된 비판을 했다는 점입니다.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했던 IS는 당시 북한은 물론이고 당시 사회주의권의 맹주였던 소련이나 중국도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고 '국가 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극한 비판을 아까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미메시스의 북한 비판은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들었다면 우익 세력보다 미메시스부터 먼저 잡아다 총살하고 싶었을 그런 극렬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코미디 같은 일은 이 미메시스가 얼마 안 있어서 IS와 엮여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다는 겁니다. 이적단체 고무 찬양으로 말이죠. 북한을 그렇게도 극렬하게 비난했던 IS와 미메시스가 북한을 고무 찬양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고 법정에 섰으니 이거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지요. 그들은 그저 '서태지 고무 찬양'밖에는 한 게 없는데도 말입니다. 국가보안법이란 그런 법입니다. 고 문익환 목사님 말씀처럼 "권투중계에서 나도 알리를 응원하고 김일성도 알리를 응원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는" 그런 법이지요. 아마 정권은 마음만 먹었다면 미메시스의 '교주'였던 서태지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집어 넣을 수 있었을 겁니다. 문건에서 문구 하나 북한의 어느 문헌하고 비스무리한 구절이 있으면 고무 찬양이 되어서 쇠고랑을 차야 했던, 그런 시절이 바로 10년 하고도 몇 년 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꽤 흘러서, 그런 날이 또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이미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나 다른 공산 국가를 찬양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상 이적 단체 고무 찬양에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판결이 나온지도 오래이고, 고무 찬양 자체도 이제는 거의 사문화되다시피했습니다. 그 만큼 이나라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많이 넓어졌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이제는 나라의 토대도 예전처럼 억압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허약체질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허약체질이 된 것일까요?

'사노련' 사건으로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를 비롯해서 이미 진작부터 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던 분들이 줄줄이 체포되었습니다. 이 분들이 비합법 전위조직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공개적으로 간판걸고 '나 사회주의자요' 하고 활동하던 분들입니다. 이미 대통령 선거 때 사회당이 두 번이나 후보를 냈고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도 각자 종류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좌파 노선을 표방해 왔습니다. 이런 판에 난데없이 이게 웬 국가보안법? 겨우 했다는 일도 유인물 뿌리고 촛불집회 나간 거랍니다. 자본주의를 뒤엎으려고 꿈꿨다? 꿈꾸는 게 뭐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옛날처럼 폭력혁명을 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단지 자본주의 '그 이후'를 꿈꾸고 주장한 것이 죄가 되는 사회라면 그건 더 이상 민주주의 사회가 아닙니다. 이적단체 고무 찬양죄라는 케케묵어 먼지 쌓인 조항이 다시 관 속의 드라큘라처럼 몸을 일으키고 나온 이상, 미메시스가 그랬던 것처럼, 드라큘라에게 걸린 희생양이 북한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비판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반정부 = 북한 고무 찬양'이라는 그 옛날의 고색창연한 수사들이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탈북자를 위장한 간첩 사건까지 터졌습니다. 원래 공안사건이라는 게 그렇지만 보통은 다 묵혀 두고 있다가 타이밍 좋을 때 딱 터뜨리는 게 보통입니다. 공안당국에서는 10년 만에 처음 간첩을 검거했다면서 '잃어버린 10년'을 은근히 되새김질하지만 참여정부 때에도 일심회 사건이나 중부지역당 사건과 같은 간첩 사건이 있었고 2005년에도 '탈북자 간첩' 사건이 있었지만 결국 혐의가 없는 걸로 드러났죠. 김대중 정권 때도 수십 명이 검거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가 '잃어버린 10년' 동안 전 정권은 놀았고 자기들만 간첩 잡은 것처럼 호들갑 떠는 꼴은 참으로 한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참고 기사 : 국민정부 이후 간첩 19명 검거

아무튼 올림픽도 끝났겠다, 이명박 지지율도 올라갔겠다, 이제 올림픽 약발 떨어졌을 때쯤 레드 콤플렉스 슬슬 부추겨 가면서 보안법으로 반정부 인사들의 목을 죄는 시나리오가 슬슬 시작되는 듯합니다. 오세철 교수가 북한을 고무 찬양했다는 말을 믿느니 차라리 남한의 모 여배우가 김정일 애를 낳았다던 뜬소문을 믿고 말겠습니다. 정말이지 잃어버린 10년을 다시 되찾겠다는 듯이 그 10년 전에 이미 폐기처분돼서 땅속에 묻힌 미이라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서 대한민국을 음습한 피라미드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이 정권이 과연 얼마나 시계바늘을 거꾸로 더 돌릴지, 참으로 궁금해지는 상황입니다.
Posted by M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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